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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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30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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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이 얼마나 극심하였는가는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지은 최치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나라 땅에서 벌어진 병(兵)과 흉(凶) 두 재앙이 서쪽 당나라에서는 멈추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따”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난을 경험한 바 있는 최치원은 그보다 더한 신라의 상황을 보고 절망한다. 최치원은 지관으로서 한재에 대비하는 수리시설을 만들고 기민을 구제하는 따위 민중의 고통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런 신라사회를 보다 못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10여조를 올려 망해가는 신라를 소생시키…(투비컨티뉴드 )
최치원
최치원에 대한 글입니다. 주나군현에서는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신라중앙政府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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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로 돌아오다
최치원이 29세로 돌아오자 신라의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에서 포부를 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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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혼란상태에 접어들어 각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중앙政府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 뒤에도 치원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으나 어느 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진성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한 사실도 최치원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헌강왕에 이어 즉위한 진성여왕 때에는 가혹한 수탈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는 사태가 벌어져 신라 전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귀각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졌지만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 신분제로 썩어 들어가는 신라사회를 보고, 최치원은 스스로 외직을 자원하여 890년부터 대산군(지금의 전북 태인), 천령군(경남 함안), 부성군(충남 서산)등지의 태수로 전전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태사 시중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바 그 편지에는 신라와 china(중국) 의 관계를 설명(說明)하고, 신라에서 당나라로 건너오는 외교 사절들을 도와 줄 것을 호소하는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