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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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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승려들은 호사스런 생활을 누렸으며, 각종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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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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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건국한 후 불교가 진흥되는 과정에서 승려의 타락상을 엿볼 수 있다아 정종의 맹목적 신앙은 불교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으며, 사람들은 다투어 승려가 되어 국사, 왕사로 출세하려고 들었으며 승려들은 높은 벼슬아치나 지방 호족 같은 귀족신분을 받았다. 한편,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사찰에서는 이들을 포용하였으나 지배자의 처지에서 보면 이것이 모두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빌미가 되었다.
다. 또, 요역(搖役)을 피하고자 출가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부모에게 불효한 자와 상전을 배반한 종들이 승려가 되어 관가의 눈을 속이기도 하였다. 11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교(禪敎) 통합의 necessity need을 깨우쳤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쓰기 대각(大覺)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가난한 자들과 떠돌이들은 승려가 되어 밥을 얻어 먹거나 몸을 절에 의탁하였다. 1182년(명종 1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지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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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개조. 속성 정.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서흥 출생.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